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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속 편하게 사는 법
선데이타임즈 | 승인 2018.10.18 13:32|조회수 : 522

지난 달에 ‘지도자의 자격’이라는 칼럼을 썼다. 칼럼이 웹사이트에 오르자마자 이웃나라에 사는 내 칼럼의 열렬한(?) 애독자 딸내미가 감상을 보내왔다. “아부지~ 전 잘 알진 못하지만 이민사회든 어디든 세상 시끄러운 건 다 똑 같네요. 아부지, 너무 대놓고 까지 마셔요. 그러다 정말로 테러 당하실라~.” 고국 형님의 걱정스러운 글도 날아왔다. “지역사회의 갈등을 부추기는 우(愚)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는 어지간한 건 보지도 듣지도 말고 편히 살았으면 한다.”

 삼부후(三不猴)라는 원숭이 인형이 있다. 하지 말아야할 세 얼굴의 원숭이를 말한다. 삼부후를 판매하는 광고문구가 “세상을 속 편하게 살려면 삼부후를 사세요!”다. 한 원숭이는 제 눈을 가리고있고, 한 원숭이는 제 귀를 막고있고, 다른 원숭이는 제 입을 가리고있다. 세상을 속 편하게 살려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속된 말로 편하게 살려면 소나 키우면서 살라는 뜻이다.

솔직히 나는 오래전 삼부후처럼 살았다. 인간의 가치는 부정과 불의에 항거할 줄 아는 것이라고 배웠었지만, 국가가 폭력의 주범이 되어 세상에 공포의 장막을 드리울 때, 나는 보여도 보지않고, 들려도 듣지않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않았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거대한 명제 조국, 자유, 민주같은 단어들은 내가 관여할 단어들이 아니라고 치부하고 살았다. 나에게 있어서는 조국, 민주, 정의같은 단어보다는 가난, 추위, 배고픔이 더 절실한 단어였다. 너나없이 먹고 살기 빠듯한 세상이었기에 모두 그러하리라 자위했다. 그것은 내 삶을 관통하는 핵심이었다.

하지만 그 어둠의 세상 속에서도 국가, 자유, 민주, 정의라는 대의를 위해 삼부후의 삶을 거부하며 자신의 삶을 내던지는 기저층 민중들이 존재했다. 그들의 삶은 주도적이었다.

 1985년, 청년 유시민은 ‘서울대 프락치 사건’의 배후로 몰려 징역 1년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중에서 항소이유서를 작성했다. 그는 항소이유서 말미에 러시아 시인 니콜라이 네크라소프(Nikolay Alekseyevich Nekrasov)의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않다”는 시구를 인용하면서 불의에 대한 양심의고통을 고백했다.

글은 피동적인 삶을 사는 젊음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그 글은 나의 종속적인 삶을 너무나 부끄럽게 했다. 그리고 거대한 명제와 맞서는 사람들처럼 살지는 못하지만, 작은 불의라도 맞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자각이 들었다.

 나는 분명히 삼부후처럼 살면 안된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세상은 삼부후처럼 살라고 속삭인다. 바르지않은 것을 바르게 하라고 지적했다가 마주치는 고단함과 따돌림을 겪을 때마다 ‘냅둬부러!’가 떠오른다. 헌데 그것도 부끄러움이다. 그것은 어쩌면 대로변에 오물을 투척하는 인간을 보면서 상대방의 위세에 지레 겁을 먹고 모르는 척하는 겁쟁이 같은 부끄러움이다.

아마도 부패하고 부정하고 뭔가 구리고 지저분한 인간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대중의 침묵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 스스로가 나의 존재가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는 것 같아 스스로에 무참 하기도 했다. 무엇에 대한 쓸데없고 주책없는 간섭이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의식과 양심은 살아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홀로 힘들었다.

 칼럼을 읽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여준 염려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흘러간 시간을 생각했다. 벌써 주책없다는 소릴 듣지 않아야 하는 시간인가보다. '주책없다'란 요량없이 되는대로 하는 행동을 일컬음이다.

자기가 무슨 조직사회의 중심축인 줄 착각해 매사 끼어들어 간섭하고 훈계하고, 나설 곳, 안 나설 곳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을 주책없다 하는 거다. 혹여 내 자신이 칼럼 속에서 자발없이 주책없는 모습을 보이고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명제 앞에선 숨죽이고 엎드려 있다가, 소소한 삶의 일탈을 무슨 대단한 불의인것처럼 나대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에 민망했다. 이젠 정말 세상을 속 편하게 살려면 어지간한 것은 삼부후처럼 살아야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어지간한 것’의 경계가 고민스럽다.

<최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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